2013/06/17

조선 최고의 시인이자 비평가!를 찬찬히 음미해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기로 유명했던 '홍길동'. 그가 실존인물인지 아닌지는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지만 그를 사람들의 인식 속에 심어줬던건 다름 아닌 조선 시대의 문신이었던 '허균'이었다.

허균은 조선 시대 선조와 광해군 시대에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이름을 떨쳤었다. 그가 성실한 독서가로서 문학 전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학에 대한 비범한 통찰을 보여주었으나 당시 사대부 사회의 규범과 통념에 반발한 그의 문학 세계는 사대부로부터 공격을 받기에 충분한 빌미를 제공했다.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된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는 허균 선집으로서 허균이 엮은 글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간한 허균의 문학 사상과 그의 세계를 일부 엿볼 수 있다.



이제 허균 선집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볼까..? 허균은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사려깊은 그의 글의 세계은 더할나위없이 행복하다.

어디로 돌아갈까

허균이 명나라로 구원병을 요청하러 떠나던 길과 돌아오던 길에 지은 시로 이루어져 있는 이 부분은 허균이 현실을 벗어던지고 살고 싶은 그의 마음을 시적으로 잘 표현해 내 시가 많다. 특히 허균이 마지막으로 지은 "잠 못 이룬 밤"이라는 시는 현재로서 허균이 지은 마지막 편저에 전한다.(원제목은 "밤에 손가둔에서 묵으며)

아이 울음소리 길손 코 고는 소리에 잠 못 이루니
한 해처럼 긴 하룻밤 한층 더 서글프네.
바람은 사립문 지나 휘장을 흔들고
달빛은 창문 뚫고 침상을 비추네.
잘도 가는 세월에 늙어 가는 나
놀라워라 지나온 영욕의 인생살이.
외양간 말 울자 마부들 소란스러워
일어나 보니 은하수가 벌써 서편에 기울었네.

이 시에서 들어나는 허균의 마음 중 "놀라워라 지나온 영욕의 인생살이"는 허균이 벼슬살이를 하며 수시로 파직과 재임용을 당하면서까지 먹고 살 수 밖에 없던 그의 마음을 47세가 되던 해에 돌아본다. 허균은 이 시를 지은 3년뒤 역모죄로 처형을 당하는데 그가 이 시를 지은 다음에 다시 벼슬에 기용되지 않았다면 더 많은 그의 글을 볼 수 있지 않았었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허균은 중국으로 사신단을 가면 항상 책을 구입하곤 했는데, 1616년 그는 중국에서 은 1만 5천냥을 들여서 책 4천여권을 구입한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많은 독서가들이 책을 구입하는데 그다지 비용을 아끼지 않으나 당시에는 이런 허균의 모습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던 듯 싶다.

그래서 그는 매우 긴 제목의 시를 지었는데 선집에선 "책 욕심 비웃지 말라"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가 소개되었다.

여러 해 연이어 중국 가는 길 비록 힘들지만
옛 사람 책 많이 얻어 오는 즐거움 있네.
가진 것 죄다 털어 책 산다고 비웃지 마오
나는 장차 책벌레가 되려고 하니.

고향집 왜란 겪고 고서를 다 잃어
세상에서 보지 못한 책 얻고 싶을 뿐.
여기 와 산 책이 몇 만권이니
등불 아래서 글 읽을 만하네.

허균의 책 욕심은 위 시를 통해서만 보아도 정말 감히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책 욕심이 대단하다. 물론 현재는 허균처럼 책을 구입하는 사람도 없지만 허균처럼 책 욕심을 부리는 이들도 쉽게 찾긴 어렵지 않을까?



내 마음 따라

내 마음 따라에서는 허균의 마음을 잘 표현해낸 시집과 이야기를 함께 엮어낸 부분이다. 특히 허균이 정치적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 갖히고 유배살이 하던 도중에 지은 시는 허균이 자신의 신세를 한타하면서도 유배살이이 와 있어도 세상사에 욕심을 끊고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허균은 1616년 1월에 북경에서 "양명학"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이제것 자신이 해왔던 공부를 부정하게 되는데 이런 점에선 "이탁오"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허균이 30여년 해왔던 공부가 어찌 아무런 효용이 없었을까

새해 첫날 성학 책을 처음 보고
지난날의 허튼 생각 홀연 녹아 버렸네.
평생 삼천 권을 독파했지만
책벌레로 화함이 마땅하여라.

허균의 지식은 이미 끝이 없었으나 허균은 양명학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으리라고 본다.

변혁의 길

허균은 선조와 광해군때에 집중적으로 탄핵을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변혁의 길에선 허균의 이런 생활 속에서도 나라를 생각하여 지은 글을 엮어냈다. 특히 후금 세력의 확대를 미리 감안하여 후금과의 관계를 재수립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후금은 이후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광해군 때부터 후금과의 관계가 잘 유지되었다면 인조가 청나라의 장군에게 무릎꿇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서쪽 오랑캐를 방비하라"는 허균이 후금을 조심해야 한다고 기록한 산문이다. 허균은 이 외에도 참된 학문, 참된 선비, 군대에 대하여, 관서와 관리를 줄이자, 버려진 인재들의 내용을 통해서도 관리 등용과 운영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허균의 이런 시각은 당시 명나라에 아부했던 사대부로서는 아연실색 할 수 밖에 없었고 허균을 궁지로 몰아넣은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내가 사랑한 사람

한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허균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따로 글과 함께 편지로 엮어냈다.



 그 중엔 평생에 걸친 허균의 더없는 절친한 벗 이었던 "이재영"에게 보내는 편지 3통도 있다. 허균은 또한 "엄처사"를 통해 효를 다하는 모습을 직접 글로 옮겨 적기도 했다. 허균은 다른 시나 글을 통해선 자주 자신의 재주를 세상에 내보인 것을 후회하는데 엄처사의 글을 통해서만큼은 엄처사가 세상에 재주를 내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한탄한다.



허균은 엄처사의 재주를 정말 아까워했지만 허균 자신이 정치적으로 세력화를 하지 못하고 희생당한 것을 감안해본다면 엄처사의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었을 것이다.

허균은 다른 사대부와 달리 형식적으로 어울리는 친구가 아닌 마음을 나누는 친구 몇몇과 주로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게중엔 앞서 언급한 평생의 벗인 "이재영"에게 보낸 편지는 허균이 벗을 얼마나 위하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허균이 공주목사에 부임한 뒤 이재영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는 허균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수령을 맡게 된 큰 고을이 마침 자네 집과 가까우니 자네 모친을 모시고 이리 오게. 당연히 내 봉급의 반을 덜어 줄테니 양식 걱정은 없을 걸세.
자네와 내가 처지는 비록 달라도 지향이 똑같고, 자네 재주가 나보다 열 배는 뛰어나건만 세상에서 버림받기는 나보다 심하니,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늘 기가 막히네
내가 비록 운수가 기박하다지만 누차 태수 벼슬을 해서 그럭저럭 연명하고 살기에 충분하거늘 자네는 늘 호구지책을 찾아 사방을 떠도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게 모두 우리 책임일세. 밥상 앞에 앉으면 얼굴에 땀이 흐르고 음식이 넘어가지 않으니, 부디 어서 오게나. 이 일로 비방을 얻는다 한들 나는 아무런 관심 없다네.

그러나 허균은 1608년 이 편지를 보내고 나서 얼마 가지 않아 공주 목사에서 파직 당한다. 허균은 친구의 재주를 아까워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보단 친구의 처지를 늘 먼저 걱정하던 그런 사람이었고 허균에게 있어 허울 뿐인 사대부 친구들보다 서얼 출신의 친구들이 더 믿음직 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허균은 이런 행동으로 인해 정치적 탄핵을 더 자주 받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를 가두지 말라

허균은 타고난 근면한 독서가이면서 자신의 생각이 매우 확고했던 선비이기도 했다. 허균의 이런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와 글을 엮어낸 "나를 가두지 말라"는 바로 이런 허균의 생각을 여실히 드러낸다.



허균은 "개도 불성이 있다더니"라는 시를 통해 생에 덧 없음을 "개"를 통해 불교의 도를 함께 이야기 한다. 허균의 평등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허균은 최천건(조선 선조, 광해군 때의 문신으로 1616년 김제남의 일파로 몰려 이듬해 죽었다)에게 보낸 편지는 허균이 최천건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자신의 심경을 글로 잘 표현되었다.

허균은 부친과 같이 삼척부사로 부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임 13일만에 파직 당해 물러나게 되었음을 아쉽고 안타깝게 여긴다.

그러나 남에게 구속받는 것을 싫어했던 허균에게 있어서 당시 조선 사회가 배척했던 불교는 편안한 휴식처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에 대한 나의 생각

허균은 앞서 소개되었던 바와 같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학에 대한 빼어난 시각을 가지고 있던 문인이었다. 허균은 자신의 문학관을 이 절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허균은 시 짓기와 글짓기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였는데, 그가 우리 문학의 계보와 허균 자신의 문학세계를 비교한 "우리 문학의 계보와 나의 문학"은 그 지점에 있는 허균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 이후 허균 자신이 엮은 선집을 통해 쓴 서문과 발문을 읽고 있으면 허균의 지식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것을 느껴볼 수 있다.

나에게 있어 허균은...

내게 있어 허균은 "홍길동전"을 지은 저자이기만 했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은 서울 출신으로서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나라. 율도국을 세운다. 허균도 자신이 겪지 않았으나 그가 일생을 두고 교류한 서얼 출신의 문인가였던 이재영과 서얼 출신 친구들과의 교류를 깊게 한 것을 보면 그의 이런 모습과 친구를 가려 사귀지 않는 성정에서 나온 책이 아닐까 싶다.

뒤늦게 고백하건데 허균은 내게 있어서 책벌레의 모상이 되시는 분이다. 내가 평생에 걸쳐 독서를 하더라도 허균 만큼 읽을 순 없을 것이다.

허균이 비록 정치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역모죄로 형장의 이슬에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의 의로움은 역사적으로 밝혀졌다.

당시에 허균을 모함했던 자들은 편안히 잘 살았을까? 선조 시대의 우암 선생도 서애 선생과 격렬한 정치적 싸움을 벌인바 있다.

허균은 비록 불운한 삶을 살았으나 그가 태어나 활동한 시기가 인조 이후였다면 그는 더욱더 빼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을 것이다.

오늘날 허균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건 허균에게 있어 남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충실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허균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본 도서는 페이스북에서 열린 IBK 이벤트로 협찬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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